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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7. 17. 11:29

 

스티븐 내들러의 에티카를 읽는다, 스피노자의 에티카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신이 있다.

본질을 담고 있는 실체로서의 자연=신이 존재한다.

이 존재하는 것을 속성으로서만 알 수 있다.

드러난 속성으로는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이 있다.

연장은 물질적인 것과 비슷한 운동과 정지로 설명된다.  그리고 사유는 비물질적인 비스끄리한 것^^ 즉 생각, 관념, 정서, 지성 등과 비슷하다. 즉 우리 인간 수준에서 인식하는 전체를 두 가지 속성으로 정의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 사유의 속성과 연장 속성이 실존적으로 확장된 것을 통해서만 인간은 알 수 있다.

이 속성들이 표현(개체화) 된 것이 양태들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도  양태이다.

 

 

잔연(신)은 표현하다.

자연(신)의 세계 안에서 운동과 정지로 설명되는 것과 사유하는 것의 어떤 것을, 신이 자신 안에서 표현한다고 들뢰즈는 설명한다. 인간은 즉 자연이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이다.

인간은 지성을 활용해서 자연(신)이 표현하는 방법(?)에 접근해야 자연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신의 표현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신이 표현하는 발생의 원인에 다다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원인에서는 신이 표현하는 것에 그 표현의 리듬을 타면 된다.

그래서 귀납적 방법이 아닌 연역적 방법이 중요하다.

신은 모든 것의 원인이기 때문에 ... 또한 그 자신이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에 ... 

 

사실 연연적 방법이라는 것이 이미 있는 사실 안에서 증명(발견...발명이 아닌,,, 인간의 레벨에서는 발견이 발명이 될 수 있는 해석이 있지만 말이다)이므로 연역적 방법은 창출적인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귀납적 방법은 추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을 결론한다기 보다는, 그렇기 때믄에 창발적인 것이 가능한 방법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다. ㅎ~

그런 의미에서 본질(자연의 질서, 혹은 신의 표현)이 이미 있는데 인간이 아직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연역적인 방법이 더 본질 접근에 더 나을 수 있다고 생각은 해 본다 ㅎ~ 문제는 원인에 다다르는 것이 문제가 되지만 스피노자는 다다를 수 있다고 말한다. ㅎㅎ~

 

 

속성도 본질을 담는 실체를 표현하는 것이다.

과정은 아니다. 그냥 표현이란다. 스스로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표현의 원인에 다다르는 것이 중요하다.

추상이나 유비에 의해 유추하는 것이 아닌 원인에 가장 직접적으로 다다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로부터는 자동기계(신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작용)적으로 양태들도 표현적일 수 있다. 신의 표현과 동일해지는 것이다.

이는 신의 역능으로 가능하다. 인간도 자연의 조각(양태)이므로, 즉 신의 일부 가능해진다.

이 조각에는  -불교의 화엄사상에 있는 작은 것에 깃들어 있는 전체의 이미지 & 부분은 전체의 일부(一卽多 多卽一)-  신의 역능, 속성이 있으므로 가능해진다.

본질의 실체는 속성과 역능으로서 양태를 표현하고, 속성의 하나 사유속성, 즉 신의 관념(지성)으로서 양태화된, 인간의 지성이, 이런 신의 표현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게 한다.

무엇보다 신이 자신을 밖으로 초월해서 표현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 안에서 내재적으로 표현한다. 자연은 모든 것이므로 ... 초월적인 가상을 해 본다 하드라도 역시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된다.

그래서 내재성이다. 그러므로 흔히 말하는 자연=실체(본질의)는 초월된 신이 아닌 자신의 그 자체적 신이다.

실체 안의 내재성으로 운동과 정지로서 그리고 사유로서 그 안에서 모두 표현한다.

표현된 나(양태)는 다시 표현한다. 이것을 양태의 변양이라고 한다. 전체성(속성을 통해 본질을) 담은 양태로서(인간으로서) ... 

 

속성의 형상인 질과, 양태인 양이 강도(내포량)와 -양태의 레벨 즉 인간의 레벨에서-외연적인(자연은 외연이 없다 그 자체가 신이다) 양이 운동과 정지의 비율에 따라 합성되어 개체화 된다. 이 것이 외연화 되어 실존이 된다. 이렇게 실재하면 그것에 대한 관념을 갖게된다.

이 실존이 지속되는 동안 인간은 살아 있는 것이 된다.

 인간도 개체들로 구성된 개체이다. 개체는 다른 개체의 구성물이 될 수 있다. 이 때 원래의 개체 그 개체로서의 지속을 멈추는 것이다.

집합적으로 복합되어 있는 개체의 지속이, 형상적인 구조들이 분할 되거나 다른 개체에 이전 변화되는 것이 양태들의 변이이다.

여기서도, 어떤한 것은 영속적인 아닌 연기적으로 임시로 묶여 있는(지속에 해당) 관계로 해석하는 불교의 이미지와 비슷하다.

이 지속은 공간이 필요하다. 형태와 장소가 필요한 것이다.

부분과 그 부분들을 모아 논 또 다른 부분이 개체화 되는 ...

 

 

인간은 양태이다.

두 개의 속성으로 표현된, 사유속성과 연장속성

쉽게 말해 생각(사유) 과 몸(운동과 정지)를 말한다.

여기에는 스피노자의 놀라운 발상이 있다.

평행론, 공통개념이다.

즉 생각과 몸은 평행하다는 것이다.

신체에서 느끼는 감각은 생각에 그대로 평행하게 있다는 것이다.

몸이 받아들이는 것을 생각으로 반영되거나 생각이 신체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중요하다거나 신체 안에 담긴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앞으로 나의 생각에 새로운 발상을 제공해 준다.

또 씨앗은 나무의 예비단계가 아니다. 씨앗은 그것으로서 완전하고 나무는 나무대로 완전하다.

그러나 씨앗에도 나무에도 깃들어 있는(표현되어 있는) 어떤 공통의 거시기 ... ㅎ~

  

발생적이라는 것과 공통개념으로 긍정을 만들어낸다. 내 생각에 ㅎ~

목적론적으로 외연된 목적이 나를 이끄는 피동적인 것이 아닌, 자신에서 출발하는 발생적인 원인 출발적인 사고는 어디를 향하기는 하지만 자신에서 출발한 벡터적인 것으로서 내재적인 목적성이 될 수 있다. 이 것이 긍정적 사고를 유발한다.

구래서리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긍정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더 확장하여 양태의 복잡한(개체들의 집합인 또 다른 개체) 사회를 구성하고 똑 같은 표현들로서 정치적인 것에 대한 해석까지 확대해 나가는 것 같다. 뭐~ 잘 모르지만 말이다. ㅎㅎㅎ~

 

 

 

 

이런 식으로 적용해서 세상 바라보기를 연습해 보....  ㅎ~

 

"에티카"를 읽기 위해  "에티카를 읽는다"를 도움 받아 같이 읽으면서

들뢰즈의 "스피노자의 표현 문제"도 병행해서 읽는다. 덤으로 이수영의 "에티카 자유와 긍정의 철학"도 읽는다.

이해하기 어려워 반복해서 읽고 새로운 생각의 지평을 보탠다.

 

읽고 문득 '아들러'나 '비코츠키' 이 사람들도 에티카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안에서 창발되는 어떤 거시기 ^^

어쩌면 생명현상도 ^^ 비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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