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지허
정확하지 않은 데, 10여년(?) 전에 인터넷에 떠돌던 글을 깊은 울림으로 읽은 적이 있는데
몇 년을 지나서 보니 '선방일기'라는 제목으로 책이 나와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당시 인터넷에 돌던 글을 모두 인쇄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보여줬던 기억이 있는 데
지향하는 곳의 추상적인(추상된) 시각이 아닌,
바라보는(추상하는) 자리의 시각에서 인간적인 모습이 사실적 감동으로 와 닿던 글이라 기억에 남았던 글 ...
그런데 서점에서 다른 책을 고르다가 같은 저자인 이 책(사벽의 대화)을 발견했다.
내 개인적으로는 '선방일기'의 감동을 넘지 못하지만
그 선방일기의 무게가 실려와서 그런지 새벽별"曉星"처럼 신선했다. 옛 것 같은 문체도 생경한 차이가 만드는 맛의 일부이다.
-
책 안에서
오를수록 산은 가팔라졌고 냉기는 더했다. 비탈에 쌓인 눈들은 겨우내 토끼새끼 한 마리 굴리지 못해 무료하던 차에 잘되었다는 듯이 나를 엎어뜨리고 미끄러뜨리고 뒹굴게 하는 것이다.
남과 다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과의 다툼이 끝나야 하는데 ...
범부가 고뇌 속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소이는 자기 자신에겐 언제나 관대하기 때문이오. 자신의 과오엔 눈을 감지만 타인의 과오엔 눈을 부릅뜨는 게 범부의 소행이오. 백안白眼을 안에 감추고 득안得眼을 밖에 표방하는 게 승직을 생업으로 삼는 승적자의 소행이오 ... 위선자가 많은 승원일수록 참배자가 많소. 왜냐하면 위선은 무능과 무지를 현혹하기 때문오. 승적자는 본래의 명분인 수세제민에 임하기 전에 양지를 투철히 해야 하며 자기 자신을 양생해야 하오.
인간이란 반드시 구도행각이 필요한가? 구도자에겐 반드시 고행이 필수불가결한가? 고행은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하는가? 나는 본本에서 자꾸만 말末로 연역해 나갔다. 회의는 나를 끝없는 미궁으로 몰아넣었다. 여러 순간이 지나갔다.
하늘로만 향했던 무거운 고개가 땅으로 숙여지면서 흐느낄 때, 햇빛은 조용히 나를 어루만지면서 흐느끼는 그림자를 그려 주었습니다. 이때 흐느끼는 그 그림자는 고개를 땅으로 돌렸던 나의 눈에 비쳐졌습니다.... 내가 나의 추태를 보여주는 이 추한 그림자가 보기 싫어 쫓으려고 몸부림 치자 그림자도 똑같이 몸부림을 쳤습니다. 내가 몸부림에 지치자 그림자도 지쳐 있었습니다 ... 내가 비로소 그림자를 보고 웃자 그림자도 따라 웃었습니다.
육신은 안으로나 밖으로나 대자對自도 아니고 즉자卽自도 아닌 맹목적인 필연이기 때문에 끝끝내 주체의 대상인 객체의 세계에 불과한 것이지, 주체적인 정신일 수는 없습니다. ... 보이는 세계는 안 보이는 세계의 한 부분이고, 안보이는 세계는 여러 개의 보이는 부분적인 세계로 드러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봄이 깊어 가자 녹아내린 雪水가 출렁이는 계곡은 벽계수가 진달래를 안아 선경을 이루었다. 우리는 매일 산에 올라 나물을 뜯었다.
성인聖人이 하늘에 복지를 창조한 인간이라면, 앞으로 올 성인成人은 땅 위에 복지를 건설할 인간입니다. 성인成人은 초인이 아닙니다. ... 인간을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처움부터 끝까지 인간은 한계성과 가능성을 동시에 지닌 지극히 인간적 존재일 뿐입니다. 성인聖人은 개인이지만 인간의 조건인 한계성과 가능성을 긍정한 성인成人은 개인이 아니고 전 인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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